역사가 바뀐 사건 2015. 7. 17. 12:10

야마모토(山本) 원수의 전사=일본 패전-태평양 전쟁

정보전쟁-야마모토(山本) 원수를 죽게 한 암호문

 

1943년 4월 18일.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山本 五十六) 원수가 전사한 날이다.

야마모토 원수의 죽음에 대해, 그 당시 여러가지 억측이 떠돌았다.

 

비행기 사고라는 말도 있었고, 戰局(전국)의 불리에 책임을 느껴 할복자살했다는 말까지도 나돌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나 자살이 아니었다.

 

1945년 9월 14일자 동맹통신발 워싱턴 전문은, 미 육군성 발표로 다음과 같이 보도된 일이 있다.

 

---"녹스 해군장관으로부터 보내온 전보에 의해서 육군의 P38 라이트닝 전투기대는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 장관 機(기)를 도중에서 요격하기 위해, 과달카달 島(도)의 비행장을 발진했다.

 

야마모토 장관은, 평소에 시간을 매우 엄수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 지점과 시각 등, 치밀하고도 정확한 격추 계획이 준비되었다.

야마모토 장관이 폭격기에 탑승하고, 6대의 전투기에 호위되어, 시속 200마일로, 부겐빌島의 카히리 비행장에 접근했을 때, 거기 대기하고 있던 P38이 엄습해 순식간에 격추해 버렸다.

그 시간은 예정에서 단 1분의 오차도 없었다. 장관기는 불을 뿜으며 추락하고 있었지만, 그 고도가 너무도 낮았기 때문에, 단 한 사람도 구조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장관의 막료들을 태운 다른 1대도 역시 P38에게 거의 동시에 격추되었다"---

 

1943년 4월 17일 오전 11시---미 해군성 2246호실이 해독한 일본 해군의 암호전문 1통이, 녹스 해군장관과 킹 작전부장의 책상 위에 놓여졌다.

 

그것은 전선을 空路巡視(공로순시)할 야마모토 원수의 일정표였다.

녹스와 킹은 예에 따라, 대통령과 회식을 하기 위해, 그리로 갔다.

 

녹스는 식사를 하면서 아까의 그 전문(야마모토의 행동 예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야마모토機를 격추함으로서 다시없는 명지휘관을 없애버릴 생각을 했다.

 

녹스는 미 해군의 증오의 표적인 야마모토를, 이번 기회에 아주 없애버림으로써, 진주만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그 당시의 야마모토 제독에 대한 미국인의 증오는, 히틀러에 대한 것보다도 훨씬 더했었다.

 

그 까닭은 야마모토가 진주만 기습을 계획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복수라는 고전적인 이름이 붙은 작전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즉시 미 육군 항공부대의 지휘관인 아놀드 장군과 P38의 전문가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녹스 장관과 킹 작전부장의 "야마모토를 토멸하라!"는

지령이, 진주만의 니미츠 제독에게 내려졌고, 누메어의 하르제 제독을 거쳐서, 솔로몬 지구 항공부대 지휘관인 미처 해군소장에게 도달되었다.

 

"복수작전"을 수행할 미처 제독에게 주어진 정보와 명령은 다음과 같다.

 

---"야마모토 제독은 4월 18일 아침, 뉴부리텐島의 북단 라바울을 출발해, 그 남동방의 최전선 항공기지인 부겐빌도의 남단 카히리로 간다. 단, 카히리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고, 발라레島의 비행장에 착륙해, 거기서 驅潛艇(구잠정)으로 카히리로 건너가게 되어 있다.

발라레島 도착은 오전 9시 45분 예정임. 야마모토 제독은 막료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 탑승기는 一式六攻(일식육공)이고, 零戰(영전) 6대가 호위함.

P38隊는 모든 방법을 다해서, 야마모토 제독과 막료들을 토멸하라! 야마모토 제독은 시간을 엄수하기로 유명함. 대통령은 이 작전을 중시하고 있음. 그 결과는 즉시 워싱톤으로 보고하라!

이 전문은 사본이나 보존하는 것을 금한다. 작전이 끝나는 즉시 파기하라!---

 

이 작전의 책임을 맡은 미쳐 제독은, 도리틀의 일본 본토 공습과 미드웨이 해전에서 용명을 떨친 항공모함 호네트 호의 함장으로 있다가, 이곳 솔로몬의 제1선으로 옮겨와, 육, 해, 해병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즉시 작전참모인 하리스 준장을 비롯한 중요 간부들과 야마모토機 격추를 위한 작전회의를 열었다. 미처는 입술을 열자 그 첫마디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새(鳥)는 꼭 잡아야 한다. 작전계획을 빨리 세우라!"

 

이 계획은 시간, 거리, 속도, 피아의 전투병력 등의 면밀한 계산 아래, 한치의 오차가 생겨서도 안되는, 가장 치밀한 것이어야만 했다.

 

처음에는 야마모토 제독이 발라레島에서 구잠정으로 갈아탔을 때 격추하자는 안이 나왔다.

 

이 안에 대해서 銃擊隊 지휘관인 랜파이어 중위는,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나는 구잠정이란 것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도 없지만, 거기다가 해상에서는 설령 그것을 격침하더라도, 본인이 꼭 죽으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왕 할 바에는 공중에서 하게 해주십시오"

 

이래서 작전계획은 바뀌어졌고, 그 공격에는 존 미첼 소령이 지휘하는 P38기 18대가 선발되었다.

그중 6대는 랜파이어 중위가 지휘하는 총격대이고, 나머지 12대는 엄호대가 되었다.

 

야마모토 탑승기가 소문과 같이 예정시간대로 행동한다면, 카히리의 북방 50마일 부근에서 저지해야만 한다.

 

핸더슨 기지에서 발라레도까지 직선거리로는 300마일이지만, 적의 索敵針路(색적침로)를 피하여 비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실제의 비행거리는 400마일로 보아야 한다.

 

접촉은 대체로 9시 35분으로 판단되었다.

고도는 야마모토 탑승기를 3000미터로 추정해 총격대는 3500미터, 엄호대는 6000미터.

 

4월 18일은 습도가 높고, 구름이 많은 날이었다.

오전 8시 25분, 尾翼(미익)을 발딱 세운 18대의 P38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미처 제독은 한일자로 굳게 입을 다문 채, 그들의 출발을 지켜보고,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꼭 임무를 완수하고 오라!"

 

이 훈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공격대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활주하기 시작했다. 총격대 중의 2대는 타이어가 터지고, 연료 계통의 고장으로 낙오했지만, 출발을 연기할 수는 없었다.

 

18대 중 16대가 이륙하자, 편대를 짜고 부겐빌을 향해서 돌진해 갔다.

일본 측의 레이더 탐지를 피하기 위해서, 약 2시간 동안은 해상을 저공 비행했고, 요격하기 몇분 전에 비로소 총격대는 3500미터, 엄호대는 6000미터의 고도로 급상승했다.

 

9시 33분이 雙胴의 惡魔(쌍동의 악마)라는 P38대는, 부겐빌島의 녹색 해안선을 가로질러, 정글로 뒤덮인 섬의 상공을 날으로 있었다.

 

"보라! 저기 일식육공이 나타났다. 마치 이 회합을 약속이나 하듯이..."

그 당시의 감동을 랜파이어 중위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의 전투태세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8機對 4機의 열세였다. 만약 우리가 30초만 먼저 적에게 발견되었더라도 우리는 무참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중략) 야마모토 탑승기의 진로에 대면하도록 몸을 틀면서 기총소사를 연속적으로 퍼부었다. 그리고 곧 야마모토 탑승기가 불을 뿜으며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일식육공은 불을 뿜기 시작만 하면 손쓸 여지가 없다. 거기다가 저공이기 때문에 낙하산도 소용이 없다. (중략) 나는 야마모토 기가 정글 속으로 내려박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기체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무서운 불길에 쌓였다. 구사일생을 얻은 愛機(애기)의 방향타에는 2발의 탄흔이 남아 있다."---

 

9시 38분, 그 일대는 다시 고요한 정적으로 되돌아 갔다.

미처는 하르제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존 W 미첼 소령이 지휘하는 P38대는 카히리 지구에 진격, 오전 9시 반 조금 지나서, 밀집대형의 零戰隊에 호위된 2대의 일식육공을 격추했음. 영전 3대도 함께 격추. 우리 P38 1대는 아직 미귀환. 4월 18일은 우리에겐 승리의 날인 듯.---

만족한 하르제는 곧 답전을 쳤다.

 

---성공을 축하함. 목표의 오리들 중에는 공작이 한 마리 끼어 있었던 것 같음.---

 

그러나 이 작전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미첼의 P38대원들에게는 엄중한 함구령이 내려졌고, 미첼 이외의 P38대원들은 그후 매일과 같이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부겐빌 주변에 출동케 했었다.

 

그것은 야마모토 장관기의 격추가 완전히 우발적인 것이었지, 암호해독에 의한 계획적인 작전이 아니라는 것을 일본 측으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랜파이어 중위는 곧 본국으로 소환되었는데, 그는 도착한 비행장에서,

-"MP의 호위 아래 육군성으로 직행하라! 도중에서 누구와도 대화해서는 안 된다"-

는 명령을 받았다.

 

암호해독의 기밀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랜파이어 중위는 대위로 진급하고, 대통령의 축전과 훈장까지 받았지만, 그의 무훈이 공표된 것은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 5월 1일이었다.

 

 

종전후 일본을 방문한 미 전략폭격조사단의 한 사람에게, 일본 연합함대의 참모였던 사람이,

"야마모토 장관 탑승기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입수한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서 미 해군사관은,

 

"전파로 입수했다."고만 했을 뿐, 더 이상은 말하려 하지 않았다.---(이하 생략)---

---끝---

 

------ 자료 출처------

黃琪鉉 著-정보전쟁-1977년 2월 5일 발행. 知慧社. P115~P121.

著者 소개

1921년 대구 출생.

홍익대학교 법정학부, 국립경찰전문학교, 중앙정보학교 수료.

1948년~1960년-경찰관(경감). 시도 경찰국.

1962년~1973년-CIA정보관(정보 서기관).

 

譯, 著書

황제 溥儀(부의)의 고백. 비밀전쟁(CIA 비화). 여간첩(무기 없는 전쟁). 정보전쟁.

posted by 만화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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